독후감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최은영

도라다녀 2023. 9. 21. 14:12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P. 19 영인문고

'그곳은 용산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다.' 그녀는 이어서 그렇게 썼다.

페이퍼백 영어 소설들을 읽으며 그녀는 용산으로부터도, 자신의 언어로부터도

멀어질 수 있었다. '영어는 나와 관계 없는 말이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이 쓰던

말이 아니었다. 내게 상처를 줬던 말이 아니었다.'

 

P. 20 

그 글의 마지막에서 그녀는 '나는 그곳을 언제나 떠나고 싶었지만 내가 떠나기도 전에

내가 깃들었던 모든 먼저 나를 떠났다. 나는 그렇게, 타의로 용산을 떠난 셈이 되었다'라고 썼다.

그녀의 책에는 내가 그때까지 읽어왔던 에세이들과는 다른 결이 있었다.

그녀의 글에서 그녀는 성공한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도,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어딘가 특별하고 특출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타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심했고 더 나아가 무정하기까지 했다.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한 비참한 순간에 대해 기록하고는 바로 다음 단락에서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스크류바를 먹는 장면을 적는 식이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그러지 않았든 그런 식의 구성이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아프고 폭력적인 순간들이

스크류바를 먹는 순간만큼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었다는 느낌을 줬기 때문이다.

 

P. 24 

누군가 내 말을 끊고, 내 의견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상황이 내게 익숙했다.

 

- 몫 -

 

P. 59

희영이 가진 장점들의 상당수는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었지만, 몇 가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타인의 상처에 대해 깊이 공감했고, 상처의 조건에 대한 직관을 지니고 있었다.

글쓰기에서는 빛날 수 있으나 삶에서는 쓸모 없고 도리어 해가 되는 재능이었다.

 

P. 66

분노는 배출될 수 없는 독처럼 하루하루 당신 몸에 쌓여갔다.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가까운 사람들을 대할 때, 심지어 당신 자신을 대할 때 당신은 예전보다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됐다. 쉽게 짜증을 냈고, 작은 일에도 화를 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자기 분노

속에 갇혀 있을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P. 79

글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건지 모르겠어. 정말 그런가...

내가 여기서 언니들이랑 밥하고 청소하고 애들 보는 일보다 글 쓰는 게 더 숭고한 일인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누가 물으면 난 잘 모르겠다고 답할 것 같아.

 

- 일 년 -

 

P. 108

은근한 따돌림이 있었을 때도 동료들은 그녀에게 친절했다. 아침이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고

엘리베이터나 화장실에서 만나면 반가운 내색을 했다. 점심을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기도 했다.

공적인 일에서 그녀를 배제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몇몇 분명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두가 받은 동료들의 청첩장을 받지 못했을 때, 

탕비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미묘하게 달라질 때, 아주 사소한 주제라도 그녀와는 사적인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려는 기미가 느껴질 때, 어떤 말도 없었지만 그녀와 함께 있어서 

버겁고 불편하다는 분위기가 감돌 때, 우리의 세계에 온전히 소속될 수 없는 당신을 나는

안타깝게 여기지만 도울 생각은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때.

 

P. 94 

그런 정보를 사람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이야기하는 다희를 보면서 그녀는 다희가 솔직하지만

아직 미숙하여 경솔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곳에서 상대에게 미리 자기가 지닌

패를 보일 필요는 없었다. 다희는 인턴 중에서도 나이가 가장 많았고 여자였다.

그런 경솔한 행동이 득이 될 리 없는 위치였다. 

 

P. 95

그러나 다희와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녀는 다희에 대한 우려가 기우였다는 걸 조용히 깨달았다.

다희의 솔직함은 사람들에게 흠만 잡힐 경솔함이 아니었다. 솔직하되 스스로를 낮추는 식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지 않았다. 실수를 해도 자신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깨끗하게 사과할 뿐,

자학하듯 자신을 깍아내리지 않았다. 매사에 눈치를 보고 저자세로 일관해온 그녀에게 다희의

그런 태도는 그녀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스스로를 질책하고 과도하게

몰아세우던 자기의 모습을, 그리고 이상하게도 다희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자신을 조금이나마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P. 97

그러다가, 실망하는 거죠. 전 언제나 사람들의 기대만큼 밝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 너 이런 애였니? 이러고 가버리는 거예요.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래서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잃고 싶지 않으니까 무리를 하게 돼요.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

 

다희 너는 깊이가 없어. 얕아. 그래서 좀 질려

 

P. 112

숨을 참고 터널 다 지나면 소원이 이뤄진다고 해서요

 

P. 115

그녀는 다희에게 서운함을 느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서운하다는 감정에는 폭력적인 데가

있었으니까. 넌 내 뜻대로 반응해야 해. 라는 마음, 서운함은 원망보다는 옅고 미움보다는

직접적이지 않지만 그런 감정들과 아주 가까이 붙어 있었다. 그녀는 다희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싶지 않았다.

 

P. 119

다희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하고 차에서 내렸다. 서운하다. 어떻게 내게 그럴 수 있나.

상처받았다. 예전의 다희라면 그렇게 말했으리라는 걸 그녀는 알았다. 애정이 상처로

돌아올 때 사람은 상대에게 따져 묻곤 하니까. 그러나 어떤 기대로, 미련도 없는 사람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마음을 걸어 잠근다. 다희에게 그녀는 더는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P. 120

저는 다희씨를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들도 조금은 좋아하게 됐어요.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에요.

 

다희가 더 깊은 이야기를 할까 한편으로는 두려웠다는 말도.

사람들은 때로 누군가에게 진심을 털어놓고는 상대가 자신의 진심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기도 하니까.

 

- 답신 -

 

P. 133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 썼던 것 같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 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 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맞춰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 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P. 144

나에게도 자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보곤 해. 분명 너를 향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을 느꼈을 거야. 쉽게 짜증을 내고 까다로운 엄마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어. 다른 사람의 삶을 오랜 시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책임져야 하는 일.

내가 좋아할 수 없는 내 모습을 자식에게서 문득문득 발견하게 되는 일을 내가 잘 

감당해낼 수 있었을지 자신할 수 없어. 내가 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와 무관하게

무겁고 복잡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거야.

 

P. 150

있는 일을 없는 일로 두는 것, 모른 척하는 것.

그게 우리의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을 대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이었던 거야.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결정적으로 힘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방식이기도 했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야. 다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고, 들쑤셔봤자 문제만 더

커질 뿐이라고.

 

P. 167

언니의 삶을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망가진 것으로 취급했어.

내가 언니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굳게 믿고 언니를 가르치려 했어. 

언니의 삶이 망했다고 판결했어

 

P. 171 ~ P. 172

재판이 끝나고 변호인은 내게 왜 법정에서 거짓말을 했느냐고 물었어.

변호인은 그가 언니를 때렸다는 내 말을 믿고 있었지.

그녀는 여자 피고인들이 사실이 아닌 불리한 증언을 부정하지 않고 자포자기하듯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이 있다면서 나도 그런 것 같다고 했어. 그러면서 이게 마지막이라고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벌 주려는 짓은 더는 하지 말라고 하더라. 스스로한테 미안한 줄

알고 살라고 했어. 나는 판결이 끝난 재판정에서 그 말을 하며 글썽이던. 아마도 엄마

또래였을 변호인의 얼굴을 잊지 못해.

 

P. 174 

언니가 선물해준 오리털 파카를 정리하면서 나는 내가 춥지 않기를 바랐던, 얼마 되지 않는

시급을 모아 최대한 따뜻한 옷을 고르려고 했던 언니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남아 있는 걸 발견했어. 내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종일 불편한 구두를 신고 서서

일하던 언니의 마음을 어림해봤어. 그게 사랑이 아니었다고, 나는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받지 못했다고 생각할 자격이 내겐 없더라. 그런 나는 언니에게 어떤 사랑을 줬나. 

나는 내게 물었지. 

나는 언니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고 여겼어. 멍청해서 이용당한다고 생각했고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휘둘리는 겁쟁이라고 생각했어. 불행에 주저앉은 채 탈출할

생각도 하지 않을 정도로 수동적인, 그래서 나를 부끄럽게 하는 인간이라고 판단했어.

그런 식으로 살아서 나에게 굴욕감을 준다고 믿었지. 언니가 과연 내 마음을 몰랐을까.

그때의 나는 내가 꽤나 마음을 잘 숨긴다고 생각했었어. 마음의 밑바닥까지 훤히 보이는

언니와는 다르다고 자부했지. 하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는지도 몰라.

 

P. 175

내 마음 안에서 나는 판관이었으니까. 그게 내 직업이었으니까. 나는 언니를 내 마음의

피고인석에 자주 앉혔어. 언니를 내려다보며 언니의 죄를 묻고 언니를 내 마음에서 

버리고자 했지. 그게 내가 나를 버리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채로.

그때 내 마음에서 나는 옳고 언니는 그르고, 나는 맞고 언니는 틀리고, 나는 알고 언니는 모르고, 

나는 할 수 있고 언니는 할 수 없고, 나는 용감하고 언니는 비겁하고, 나는 독립적이고 언니는

의존적이고, 나는 떳떳하고 언니는 비굴하고, 나는 배려하고 언니는 이기적이고, 나는 언니를

지켰고 언니는 나를 버렸지. 모든 것이 분명해서 더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믿었어. 하지만 

긴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 파종-

 

P. 190

소리는 그런 아이였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고 어떤 것도 조르지 않았다.

슈퍼에 데려가서 먹고 싶은 것 하나를 골라보라고 하면 세 살짜리 아이가 삼백원짜리

껌 한 통을 가져왔다. 당시 아직 이십대였던 그녀는 그런 소리가 그저 기특하기만 했다.

그와 함께 살게 되었을 때, 소리가 아이답지 않게 아무것도 조르지 않고 바라지 않는다고

그녀가 자랑하자 그는 놀란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소리에게 물었다.

소리는 뭘 먹고 싶어? 소리는 뭘 하고 싶어? 소리가 아무거나 괜찮다고 대답하면 아니,

소리가 진짜 먹고 싶은 거, 라며 다시 물었다. 아무거나는 답이 아니야, 소리야. 

그는 그렇게 말했다.

 

P. 197

"혼자서도 잘하고 소리도 이제 다 컸네" 집에 놀러 온 이모가 그렇게 말하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리 아직 아이예요" 그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소리가 가끔 짜증을

내거나 고집을 피울 때도 야단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애 버려, 오빠" 그때는 그런 균형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소리의 역성을 들어주고, 그녀가 훈육하는 식의 균형. 올바른 육아는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그녀와 그는 소리에게 최선을 다했다. 

 

- 이모에게-

 

P. 246

나는 안정과 독립에 대한 갈급함으로 입시에 매진했다. 고통스러울 정도로 나를 몰아세우자

놀랍게도 나를 아프게 하는 생각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건 가학적으로 귀를 막으면서

진짜 문제들을 뒤로 미루는 방식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꽤 잘 해내고 있다고 믿었다.

사관학교 입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노트에 결심을 적어놓았다. 

사관생도가 될 것, 군인이 될 것.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 나의 나약함에

싸워 이길 것. 절제할 것. 사람에게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을 것.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엄격할 것.

사관학교에 들어간 후, 나는 '사관생도가 될 것'이라고 쓴 문장에 줄을 그었다. 그리고 다른

문장들은 그대로 남겨두고 아침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집을 벗어나고 싶어서,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선택을 했다고 나는 오래

믿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택에 그런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도 시절의 나는 그저 과정을 통과하기 위해서만 훈련을 받지 않았다. 

내 수준에서 해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스스로에게 요구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정신력으로 몸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기분이 좋았다.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간다는 고양감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P. 247

"군인은 너 같은 애들이 되는 건가 봐" 1학년을 마치고 자퇴를 결정한 동기가 방을 빼며 말했다.

나 같은 애들. 나는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그 애는 말을 이었다.

"너도 감정이라는 게 있어? 성공하겠지. 넌 , 그래도 난 너처럼 살고 싶진 않아"

"그래"

나는 그렇데 답하고 자리를 떴다. 나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멋대로 나를 판단했다고 분노하면서도

나는 그 애의 말에 마음을 다쳤다. 그 말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

 

P. 295

이번 여행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기남은 우경 앞에서 실수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일상적인 말을 주고받을때도 신경이 쓰였다. 첫날에는 이런저런 질문도 하고 이야기도 이어나가려던

우경의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기남은 이번 방문으로 그간의 거리를 좁힐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기대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돌아봤다. 홍콩에 초대해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했는데

더 많은 걸 바란 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다.

 

P. 302

같은 편이었던 여자가 기남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고서 광둥어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마치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기남이 다 알아들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이. 기남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빛은 다정했다. 그 눈빛을 보면서 기남은 이상하게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여자는 게임에 썼던

형광 주황색 탁구공을 기남의 외투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땡큐" 

그러자 여자가 기남을 꼭 껴안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여자 둘도 기남을 한 번씩 꼭 껴안아줬다.

누군가와 이렇게 포옹을 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진경이나 우경이 어릴 때 안아본 게 기남이 해본

포옹의 전부였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여자들과 포옹하면서 기남은 예상치 못한 따뜻함을 느꼈다.

그 포옹이 얼마나 좋았는지 기남은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마음먹었다.

 

P. 318

부끄러움. 마이클의 말이 맞았다. 기남은 부끄러웠다. 우경의 눈에 비칠 자신의 모습이, 

그 애가 오래 전 자신을 멀리 떠난 일이, 진경의 알코올중독이, 두 아이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사실이....기남은 부끄러웠다. 남편에게 단 한 번도 맞서지 못하고 살았던 시간이,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란 것이.....기남은 부끄러웠다. 부모에게 단 한 순간도 사랑 받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가, 하지만 그 사랑을 끝내 희망했던 마음이......기남은 이 모든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할 수 없었다. 부끄러워서, 기남은 죽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다.

 

P. 319

"부끄러워도 돼요, 부끄러운 건 귀여워요. 에밀리가 그랬어요"

......

따뜻한 통증이 기남의 등과 배에 퍼져나갔다. 기남은 마이클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클은 자신을 몰랐고 자신이 살아온 시간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 애가 오히려 자신보다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 건

무슨 이유였을까. 부끄러워도 돼요. 기남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말.

기남은 그 말을 잊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