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일입니다. 어머니는 제게 장보는 심부름을 자주 시켰습니다.
계산하는 방법을 훈련시키려는 목적이었을 겁니다. 슈퍼는 코앞에 있었습니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상가가 있고 상가의 지하에 큰 슈퍼가 있습니다.
5천 원짜리 지폐를 받아들었습니다. 한 번 접고, 다시 한 번 접으니 작은
사각형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걸 바지 뒷주머니에 집어넣고 집을 나섰습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지폐를 꺼내던 순간이 기억납니다 주머니에는 돈이 없었습니다.
아마 그때까지 인생에 있어 최대의 위기였을 겁니다. 이 돈이 없으면 집에서
쫓겨나거나 최소한 크게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집에서 슈퍼까지 가는 길을 되짚어 바닥에 돈이 있지 않나 찾아보았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되돌아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날은 어두워지고 가로등이 켜졌지만
지폐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찾으러 나왔어요.
어머니를 발견한 순간 저는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이후의 다른 건 기억에 없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지폐를 찾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괜찮다고 대답하는 어머니의
음성만은 여태 제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려 찾아 헤매고 있는 분들이 계시나요.
어떻게 하면 그걸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시간을 되돌려 상상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분이 계시나요. 그렇다면, 괜찮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건 이미 잃어버려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을 수습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저는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이야기들을 좋아합니다. 물론 잘 만든 이야기에 한해서입니다.
불편하지 않은 이야기는 제게 별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이미 알고 있거나 오래전에 동의한
화두를 구태여 다시 확인하는 것, 이미 상식이 되어 쌀로 밥 짓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들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야기가 불편하다며 싫어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은 이야기의 화자가 바로
그 불편한 광경과 설정에 동의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골딩은 소년들 사이의 살육에 동의해서 '파리대왕'을 쓴 게 아니고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 정부에 의해 지배당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1984'를 쓴 게 아니며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미성년자의 사랑을 널리 권하기 위해 '롤리타'를 쓴게 아닙니다.
세상은 결코 선한 것과 악한 것 혹은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명쾌하게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는 반드시 회색지대가 존재하며, 입장과 관점에 따라 판단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때로 불경하고 비윤리적으로 보이는 회색지대를 바라보는 일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대안과 영혼을 살찌우는 양식이, 언제나 저 불편한 회색지대 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회색지대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위기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위는 '최소한의 이웃' 에서 나를 강렬하에 잡아끄는 2개의 글이었다.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나 자신을 의심하고 있는 나에게
진심으로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그가 고맙다.
이미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수습하고 다음을 준비하는 일,
그것이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인 것이다.
그리고 불편한 이야기에 대한 것들은 마치 나를 향해 말하는 것 같아서 화들짝 놀랐다.
사실, 불편한 이야기가 불편해서 부끄럽게도 외면하고 살았다.
그 대상이 내가 될 수도 내 가족 또는 친구가 될 수 있는 데도
오늘만 무사하길, 나만 아니길, 이런 마음으로 하루를 마감했다.
빠른 변화는 기대할 수 없지만 갖힌 마음에 빛을 들여 조금씩 열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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