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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남매의 명랑한 기억

친 오빠와 나는 2살차이다. 언니였으면 좋았을 테지만 사람 일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빠와 나는 남매로 세상의 인연을 맺었으나 커서는 각자의 인생행로가 달라 함께 하는 일이 점점 줄었다.

하지만 생각 없던 어린 시절에는 오빠와 함께한 추억이 꽤 있다.

신기하게도 유년 시절의 기억은 오빠도 나도 공집합으로 추억하는게 거의 비슷했다.

 

자장면이 한 그릇에 300원이던 시절이 있었다.

1980년초반, 그러니깐 내가 초등학교 1, 2학년때인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지.

동네에 '태화루'라는 중국집이 있었는데 오빠와 나는 300원만 모이면 그 중국집으로 달려가 자장면을 시켜 먹곤 했다.

300원이 있으면 한 그릇을 시켜 나눠 먹었고, 600원이 있으면 두 그릇을 시켜 각각 먹었다.

부모도 없이 어린 남매가 와서 자장면을 시켜 먹는 풍경이 중국집 주인에게는 어떻게 비춰졌을지 의문이다.

그때는 1도 생각해 본적 없지만 말이다.

얼마나 맛있던지 자장면 그릇에 얼굴을 푹 파묻고 먹었던 기억이 있다.

서로 말도 안하고 입가에 까만 짜장 소스를 묻혀가며 계속 입안으로 면발을 밀어 넣었다.

커서도 많이 먹게 된 자장면이지만 그 때 그 맛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쫀득한 면발에 달콤하면서도 윤기 바르르 흐르던 자장소스, 진짜 백만 불짜리 맛이었다.

가끔 오빠가 하는 말이 있다. 자장면의 어느 부분가 젤 맛있는 줄 아느냐고.

나는 자장면이 단품인데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면 오빠는 자장면은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딱 나눠

면발과 소스를 잘 비비고 난 후 젓가락에 묻은 소스,  그것을 입으로 한번 슥 닦으며 먹을때

그 부분이 젤 맛있다고 했다. 진짜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말이다.

자장면을 먹을 때 처음 맛 보게 되는 나무 젓가락에 묻은 자장소스 ,오빠는 그게 젤 맛있던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부터 자장면을 먹을 때 정성껏 잘 비빈 후 젓가락에 묻는 소스를 음미하며 먹곤 한다.

자연스레 오빠 생각도 난다.

 

그리고, 국민학교 겨울 방학 때, 오빠와 나는 시골 여수에서 보낸 기억이 있다.

엄마와 아빠의 고향이 둘다 여수이다. 친가와 외가가 큰 길가를 기준으로 서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이것도 지극히 저학년 때의 기억이다. 아빠가 사업으로 바쁘셔서 엄마도 같이 바빴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오빠와 내가 번잡스러웠던지 남매를 겨울 방학 시작과 동시에 여수에 데려다 주고는 개학할 때쯤 다시 데려왔다.

그러면 거의 두 달 동안 여수 시골에서 보내게 되는 것인데, 겨울방학 탐구생활과 돈 천원을 가지고 왔던 기억이 있다.

나의 유년 시절의 제일 신남을 이야기 하라면 바로 이때이다.

오빠와 나는 여수에 온 다음 날부터 이 곳 아이들과 똑같이 시골 아이가 되어갔다.

논밭이 꽁꽁 얼은 곳에서 사촌 오빠들이 만들어 준 나무 썰매를 탔고

할아버지가 동네에서 조그만 전방을 하셨는데 과자를 몰래 훔쳐 먹기도 했고

외할아버지네 가서는 사촌 언니 오빠들이 더 많아 매우 신났었다.

그리고 시골에는 곳간이라는 음식 저장 방이 있는데 그 곳이 나는 너무 신기하여 자주 드나 들었다.

밤마다 게임을 하고 지면 무서운 시골길을 지나 가게에서 과자를 사와야 하는 미션도 했었다.

무서우면서도 참으로 재미있던 기억이다.

마당에서 리어카에 새끼 강아지들을 몽땅 싣고 신나게 운전도 하고 같이 타고 놀았는데

강아지들이 토를 하여 할머니한테 엄청 혼났었던 기억도 있다.

시골집에 닭, 토끼, 소, 염소, 개가 기본으로 있었는데 화장실 바로 옆에는 염소와 소가 있어 나의 볼일을 다 지켜봤다.

또한 외할머니네 집 뒤에는 땅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도 신나게 놀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놀이터였다. 억지도 만들지 않은 자연놀이터,

동물원에 가지 않아도 되고 보드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고 스케이트장에 안 가도 되는 그런 시골이었다.

사실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은 이게 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은 시골 여수에서 논 기억 말고는 생각나는 것이 별로 없다.

오빠를 만나면 가끔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곤 하는데 오빠도 나와 기억이 비슷해서 놀랐던 적이 있었다.

남매의 기억이 하나로 일치되는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다시 서울로 돌아올 때 함께 오는 것이 있다. 바로 머리에 '이' 를 옮아가지고 오는 것이다.

엄마가 이 잡는 참빗으로 머리의 이를 잡아 주었는데 엄마 무릎에 누워 머리를 맡기면

시원하면서도 졸려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세상 물정 모르던 꼬마들이 어느덧 어른이 되어 한집안의 가장과 엄마가 되었다.

인생의 무게에 눌리고 바빠서 자주 연락도 못하고 지내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은

고스란히 마음 한 켠에 자리잡아 지금 살고 있는 날들에 자양분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다고 믿고 있다.

인생의 명랑 만화 같은 한 페이지가 있다면 바로 오빠와 보낸 유년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너무 천진난만하게 즐겁고 행복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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