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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엄마 소리

결혼하기 전, 엄마집에서 살 때 일요일 아침마다 들리는 소리가 있다.
압력밥솥이 칙칙폭폭 돌아가는 소리, 도마에 대고 무언가 써는 소리,
냉장고 문을 여닫는 소리, 가스렌지에서 무언가 끓이는 소리, 유리가 깔린 식탁위에 무언가 계속 놓는 소리,
끊임없이 들리는 이 소리에도 안 깨고, 꿈을 꾸듯 침대 이불안에서 계속 뭉개고 있으면
어김없이 엄마의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일어나 밥 먹으라고!'  한두번 소리치는데도 안 일어나면 갑자기 인신공격으로 바뀐다.
예를 들면 '그렇게 게을러서 커서 뭐가 될래'   '어디가서 밥이나 벌어먹고 살겠니'
'엄마는 아침에 새벽같이 일어나서 청소하고 밥하고 이거하고 저거하고 다 했는데
넌 누굴 닮아 이 모양 이꼴이니.. ' 등등
이렇게 욕을 많이 먹고 겨우 일어나서 식탁앞에 앉아서도 적극적인 식사가 되지 않는다.
잠에서 깬지 얼마 안 됐는데 밥 맛이 있을리가 없지.
그러게 왜 자게 냅두지, 깨우냐고 엄마한테 짜증을 낸다.
진짜 엄마 말대로라면 호강에 겨워 날라리가 났다.
그렇게 귀한 밥상을 차릴 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식탁앞에 앉아 세상 심드렁한 얼굴로 밥을 먹는둥 마는둥 하고 있으니
얼마나 내가 꼴보기 싫었을까. 그렇게 인신공격을 하는 것도 이제 이해가 간다.
왜냐하면 이제 내가 엄마처럼 그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부엌에서 아침 만드는 소리뿐 아니라 잔소리까지 거의 똑같이 하고 있어서
가끔씩 나도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특히, 전자압력 밥솥이 예전 엄마의 밥솥과 똑같은 소리를 내며 돌아갈때는 소름이 끼쳤다.

엄마는 엄마 나름대로 스케쥴과 의무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안다.
일단 가족들에게 아침을 먹여야 다른 일을 순조롭게 이어나갈 수 있으며,
그 이후의 많은 할일들이 있다는 것도, 그 주된 임무는 아침 이후에 다가올 점심, 저녁식사를 준비하는것이
대표적이라서 조금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서, 일요일을 주도적으로 이끄는 사람이 엄마란 것을 알게 되었으며
엄마의 그 귀찮은 수고에 내가 삼시세끼 밥을 먹으며 잘 자랐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당연한 것들을 감사한 줄 모르고 도리어 짜증으로 응대했으니 이런 불효가 없다.
그래서 내가 내가족들에게 엄마와 같은 비슷한 희생을 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엄마에 대한 불효를 엄마에게 잘해야 하는데, 내 남편과 자식한테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마도 엄마가 아침을 차린 것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하는걸로 인식하는 것 같다.

내가 아침의 소리를 낼때 엄마가 생각난다.
요즘은 좀 아프신 우리 엄마,
더 이상 아프지 말아야 할텐데,
내가 엄마집으로 찾아가 엄마의 소리를 내며 밥을 차려드리는 건 어떨까.
그러면 엄마가 막 저리가라고 할 것 같은데,
그냥 맛난 피자와 치킨을 사갈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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