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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

김태희

내게 좀 통통한 친구가 하나 있었다. 과거 형으로 쓰는 것은 현재 그녀는 통통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김태희,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건 고 2때였다. 우리반도 아닌데 우리 반에 와서 수업을

듣는 독특한 학생이었다.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실루엣이라 어딜 가나 그녀는 눈에 띄었다.

나는 당시 굉장히 내성적이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다소 적극적이고

괄괄해 보였던 그녀와 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 치도 못했다. 그러던 중에 우리는 고3때 같은 반이 되었다.

당시 이름 가나다순으로 자리를 앉았기 때문에 같은 김씨인 그녀와 나는 같은 구역에 앉게 되었다.

그래서 친해지게 되었고 같이 도시락을 먹고, 쉬는 시간에는 매점으로 달리고 하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재수 삼수 사수를 하면서 낮에는 노량진에 터를 잡고 공부를 하면서 수업이 끝나면 꾸준히

노래방을 드나들었다.

그 후, 서로 다른 대학을 가면서 각자의 삶으로 들어갔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이를 먹어갔다.

내가 30년동안 보아온 그녀의 몸매는 늘 같았다. 적어도 올해 초까지는 그랬다.

사실 조금씩 살이 빠지고 있었는데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기에 비슷하다고 간주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등장한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본 모습 중에서 젤 날씬한 몸으로 나타났다.

블라우스 반팔 끝자락에는 가느다란 팔이 부러질 것처럼 나와있었고,

얼굴은 살이 빠져 팔자주름 굴곡이 생겼으며,

바지를 입었는데 바지통에 천이 남아돌아 펄럭이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순간 많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와. 드디어 성공했네~. 김태희! 평생 했는데 이제 됐구나! 됐다, 됐어!

하는 놀람의 축하와 함께, 새 학기에 처음 만나는 친구인양 슬림한 그녀가 낯설게 느껴졌다.

본인도 처음 겪는 일이지만 내 친구 김태희 몸매가 참으로 익숙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난 김태희 너의 푸근한 몸을, 주름 낄 틈 없는 너의 동그란 얼굴을,

특히, 쌩글 웃을 때 도드라지는 너의 볼을 사랑했는데, 그리고 제일 많이 사랑한 건

그 몸에서 나오는 호탕한 웃음소리, 난 그 웃음소리 들을 때마다 안 웃긴데도 그냥 웃을 때도 많았단 말이야.

살은 김태희 네가 빠졌는데 왜 빠져나간 살만큼 내가 서운한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내가 알던 김태희 몸매를 그리워하며 혼자 추억 속을 걷고 있었다.

사실 살로 파생되는 에피소드가 많이 재미있기도 했다.

북한산을 힘겹게 등반했던 일, 아마 등산할 때 태희가 없었다면 그 등산의 추억으로 기억나는 게

별로 없었을 게 분명하다. 김태희랑 식당 가서 음식 많이 달라고 하면 식당아줌마가 진짜 많이 줬던 일,

아무것도 안 한 나는 덩달아 많이 먹어 좋았는데, 김태희의 살들이 나에게 기쁨을 주고 만족도 주고 좋았는데.

이제 옛추억으로만 남겨야 하는가.

그녀로 인해 30년동안 잘 웃고 잘 먹고 살았으니 이제 그녀의 뜻대로 갈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어야겠다.

언제 내 허락 받고 살을 찌고 살을 뺀 건 아니지만 말이다.

외형의 변화가 내면의 모습도 변하게 만드는 건 아니니깐, 내가 아는 김태희의 본질은 그대로니깐

그녀의 외형변화를 너무 서운하게만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이제 김태희~그 동안 몸이 무거워 못했던 거 이제는 가볍게 훨훨 날아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대신 건강하게 날씬해야 해. 아프거나 골골거리면 안 된다.

너의 몸은 네 것이지만 우리의 추억이기도 했으니깐 소중하게 지켜내~

응원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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