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재미있는 글이 있어 필사해 봅니다.
맥시팬티의 신세계
경고 : 이 글에는 '팬티'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많이 등장합니다.
팬티를 사러 갔다. 팬티를 사는 돈은 왜 이렇게 아까운지 모르겠다.
사실 밖에 나가서 커피 한 잔에 크루아상 하나를 주문할 돈이면 싸구려 면팬티를
다섯 장에서 일곱 장은 살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하나를
사고 팬티를 사지 않는다. 현명한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현명한 여자는 내적인 만족을 위해서 팬티를 살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새 팬티보다는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 하나가 더 큰 내적 만족을 준다.
아니다. 나는 그저 본능적이고 저차원적인 인간인 것이다.
내게는 '내'적인 만족보다는 '위'적인 만족이 더 중요한 것이다.
구멍 난 팬티를 입고서 고상한 척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
얼마 전 나는 남은 팬티가 두 장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두 장의 팬티로는 살 수 없다. 별수 없이 새 팬티를 사러 마트로 갔다.
마트의 속옷 코너에는 온갖 팬티들이 걸려 있다. 나는 레이스팬티는 사지 않는다.
레이스팬티를 입고 누굴 꼬실 일도 없다. 나는 평범하고 단순한 면팬티를 사기로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팬티 한 장에 5000원이라는 거금을 투척할 (마음의) 여유 같은 건 없다.
기껏해야 팬티 아닌가. 나는 일곱 장에 9900원 하는 팬티 세트를 발견했다.
바로 이것이다.
일곱 장에 9900원 하는 팬티 세트는 두 종류였는데, 미디팬티와 맥시팬티였다.
대체 미디팬티와 맥시팬티의 차이는 무엇일까. 일곱 장의 팬티가 든 박스의 사진 속 여자는
모두 같은 디자인의 팬티를 입고 있었다. 종이박스는 철저하게 밀봉되어 있어서 뚫린 구멍
으로는 무늬 외의 어떤 차이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싸구려인 만큼 고객 서비스에는 과감한
비용을 절감을 실천한 것이다.
미디와 맥시를 놓고 한동안 망설이던 나는 결국 맥시팬티를 골랐다.
아무래도 맥시팬티가 더 넉넉한 디자인일 것 같다. 팬티라도 편할 걸로 입자.
아주 오래전 아무 생각 없이 티팬티라는 걸 사서 입었다가 하루 종일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던 일을 떠올려보라. 세상만사 불편한 것투성이인데 불편한 팬티까지 입고
고문이라도 당하듯 살고 싶지 않다. 결론은 맥시팬티다.
아마 결혼전이었다면 맥시팬티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조건 미디팬티였을 것이다. (미디팬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나도 이제 아줌마가 다 되었구나' 하고, 아줌마가 된 지 13년 차인 나는 생각했다.
집에 와서 설레는 마음으로 박스를 뜯었다. 보석 반지건 싸구려 팬티건,
새로 산 물건의 포장을 뜯는 일은 뭐든 설레고 두근거린다.
그런데 맥시팬티는, 이럴 수가, 기저귀만큼이나 컸다.
나보다 몸무게가 15킬로그램쯤 더 나가는 남편이 입어도 될 정도로 컸다.
어린 시절 동네 할머니들이 목욕탕에서 이런 팬티를 입고 다니는 걸 본 기억이 났다.
그나마 95사이즈와 100사이즈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그래도 아직 100은 아닐 거야' 하고
불안해하며 95사이즈를 골랐는데, 100이었다면 반바지를 입고 다닐 뻔 했다.
나는 그 큰 팬티를 바라보며 나의 늙음을 착잡해했다. 심지어 무늬도 너무 촌스러웠다.
살구색 바탕에 작은 장미꽃들이 잔뜩 그려진 저 팬티를 과연 나는 입어야 하는 것일까.
그날 밤 샤워를 한 후 새로 산 맥시팬티를 꺼내 입었다. 깜짝 놀랐다. 몸에 딱 맞았다.
충격이었다. 딱 맞는 것뿐만 아니라 너무 편했다. 나는 거울 앞으로 달려갔다. 뭐야,
왜 이렇게 잘 어울리는 거지 ? 이래도 되는 거야 ? 심지어 맥시팬티는 맵시도 대단했다.
맥시팬티는 내 아랫배에 눈처럼 소복하게 쌓인 중년의 뱃살을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임신과 출산을 두 번 경험하며 넓어진 골반도 넉넉하게 받쳐주었다.
그냥 볼 때는
촌스럽던 무늬도 입고 보니 사랑스러웠다. 이것이 바로 맥시팬티의 신세계인가.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처음에 맥시팬티가 잘 맞으면 비참한 기분이 들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편하고 예뻐. 이런 팬티는 처음이야. 기분이 너무 좋아"
"그러게, 그건 그냥 큰 팬티가 아니라 몸을 잘 감싸주는 팬티인가봐"
결혼 13년 차의 남편은 생존법의 대가가 되었다.
외계인에게 붙잡혀 화성으로 끌려가도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맥시팬티를 입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커피 한 잔과 크루아상하나를 먹을 때와는 또 다른 기분 좋음이다.
물론 타인에게 자랑하고 싶은 기분 좋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자랑을 하고 있다)
가족 말고는 누구도 맥시팬티를 입은 내 맵시를 볼 일이 없겠지만, 설사 보게 된다고 해도
'음, 저기 팬티를 입은 아줌마가 있네' 라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겠지만, 나는 맥시팬티를
입은 내가 마음에 든다.
지난 40년간 내가 입은 수백 장의 팬티들은 하나같이 몸을 꼭 죄었다.
그 팬티들은 팬티로서의 존재감을 강하게 주장하는 팬티들이었다.
그 팬티들은 내게 팬티만 입고 스트립쇼라도 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맥시팬티는 다르다. 만날 때마다 푸근하게 끌어안아주는 넉넉하고 따뜻한
아주머니를 입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의 가장 못나고 누추한 부분들마저 지지받는 느낌이다.
좋아하는 팬티를 입고 있으니 어떤 계기도 없이 내적 자신감이 차오르는 것만 같다.
아니, 이건 꼭 자신감과 자존감이 같은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느낌과 비슷하다.
예전에는 그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자신감이 있는 척했지만
자존감은 약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맥시팬티는 자신감이 아니라
자존감을 높여준다. 그렇게 어렵던 일이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다니 기분이 좋다.
정말로 좋다.
어쨌거나 지금껏 한 번도 레이스가 달린 공단팬티 같은 건 입어본 적이 없다.
그런 걸 입어도 이런 기분이 들까? 아니겠지, 아닐 거야.
어쩌면 팬티 같은 데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 나는 이제 다 늙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 끝 --
그래서 최근에 나도 팬티를 하나 사입었는데 분위기가 맥시팬티인 것 같았다.
그냥 보기에 너무 커서 이거 괜찮을까 싶었는데, 입었는데 웬일이야,
너무 잘 맞고 한수희 작가님 말처럼 배를 포근히 감싸주는게 기분이 너무 좋아.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느낌이야, 나도 드디어 맥시팬티의 신세계로 들어간건가.
우와, 난 이제 이 세계에 정착할 것 같아~
'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순 - 양귀자 (2) | 2025.04.21 |
---|---|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 장류진 (2) | 2025.03.06 |
김미경의 딥마인드 - 김미경 (0) | 2025.02.17 |
더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 - 이주윤 (0) | 2025.02.10 |
우리는 언젠가 만난다 - 채사장 (0) | 2025.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