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치료는 잘 되어가는 줄 알았다. 막연하게도 그 선생님들이 그대로 유지되어 아이를 잘 이끌어 줄줄 알았다.
아이가 더 이상 안 하겠다고 할 때까지 하는 줄만 알았다. 선생님이 나서서 관두는 이런 복병은 조금도 생각지 않았다.
막말로 아이는 그들의 돈줄이기 때문이다. 일년 가까이 계속된 치료는 어떤 차도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아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선생님을 믿으면서도 믿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서서히 균열이 생긴 것 같다.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면서도 쉽게 관두지 못하는 이유는 딱히 다른 뾰족한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선생님이 가성비가 안 맞는다는 이유로 떠날 때, 워낙 능력 있는 선생님이니깐 수지타산이 더 잘 맞는 곳으로
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해하려고 정말 부단히 노력했다. 잘 나가는 사람이 몸값을 올려 소속사를 옮기고 하는 일들은 내가 막을 길이 없다. 그렇게 한 분을 떠나 보냈다. 다만 아이를 가르치고 하는 일이 물건을 사고 파는 일이 아닐진 테,
한 아이의 교육과 성장에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계시는 지는 정말로 의문이었다. 어떤 대안을 주셨지만 실행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실망감을 안고 애써 태연한 척 그렇게 첫 번째 선생님을 떠나 보냈다.
두 번째 선생님이 떠난다는 소식을 들은 날, 하다가 안 되니깐 버리고 떠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쯤에서 손을 떼야 본인 경력에 누가 안될 것이라는 나만의 생각이었다. 그래,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실망감은 내 마음에 배반, 절망, 깊은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내가 두번째 선생님을 믿지 못한 게 선생님께도 전달되어 이런 결과가 나온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예견된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선생님께는 미안한 마음과 함께 서운함이 동시에 밀려 왔다.
원장님께는 이 센터를 너무 오래 다닌 것 같다고 푸념을 했다. 그리고 두번째 선생님의 험담을 하기도 했다.
그 선생님께서 내 아이를 감당 못하는 것 같다는 둥, 당황해서 간혹 말문이 막힌다는 둥, 이런 저급한 말들이
나도 모르게 막 튀어나왔다. 뱉지 않으면 병이 될 것 같은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마저 시원하게 다하지 못했다.
집에 오니 하고 싶은 말들이 계속 머릿속을 떠 다녔다.
시간이 일주일 가량 지났다. 난 지금 새로운 선생님을 알아보지 않는다.
그 동안 그 먼 곳을 매주 아이와 함께 다니느라 많이 지쳤고 힘들었다.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게 치료한 시간만큼 성실하게 결과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마음은 그런 게 아니다.
마음도 블록 쌓듯 쌓으면 높아지면 좋겠다. 영어 단어 하나 외우면 알게 되는 그런 거면 정말 좋겠다.
개미 지옥에 갇힌 기분이다. 이 끝나지 않는 시련은 언제쯤 나를 자유롭게 해줄까.
할 수 있는 만큼 했는데 더 해야 하는 걸까. 아니 할 수 있는 만큼의 조금을 더 했다.
만약 여기서 더 하게 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나로서 온전히 버텨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